커피를 '양탕국'이라 부른 사람
"고양 부씨의 시탄장(장작판매장)으로 오시오, 커피를 공짜로 주겠소!"
위는 1910년대 장작 유통사업을 하던 프랑스인 플레장의 홍보문구이다.
프랑스 상인 플레장이 우리나라에 온 것은 1910년이었다.
제국주의로 인해 열강이 식민지를 늘리고 있던 그때,
힘없고 가난한 나라로 들어와서 한바탕을 해서 큰 돈을 버는 것 또한 비교적 열강의 국민들이라면 쉬웠을수도 있었겠지만, 낯설고 먼 이땅으로 들어온 그 프랑스인의 용기에 우선 박수를 보낸다.
그 당시 한양의 장작 유통업을 장악하고 있던 장작왕 최순영의 독점적 사업에 밀려
장작 유통망을 확보하지 못하던 플레장은 몇날 몇일을 고민하던 끝에 커피마케팅을 생각해냈다.
프랑스식 이름 '플레장'을 한자식 이름인 '부래상'으로 개명하고,
보온병에 커피를 가득 담아 일산 등지에서 무악재나 자하문고개를 넘어오던 나무꾼에게
"저는 고양 부씨요~ 날도 차가운데 커피한잔 하고 가시오~"
라고 커피한잔씩을 권했다.
(낯선 서양인이 커피보온병을 들고,
커피란 것을 처음 접하는 나무꾼들에게 커피대접을 하는 장면은 지금 생각해봐도 참 우습다.)
살을 애는 듯한 칼바람에 온몸이 얼어붙은 나무꾼들은 부래상의 커피를 한모금씩 마시며 온기를 채웠다.
그리고 서서히 그 맛에 길들여졌다.
나무꾼들은 커피를 '원기를 복돋워주는 서양 국물'이라는 의미로 '양탕국'이라고 불렀다.
그 양탕국은 먼길을 걸어온 그들의 근육과 정신을 각성케하는 정력제와도 같았다.
부래상의 커피마케팅은 효과를 제대로 보아 장작 사업은 점점 커져나갔으며,
부래상은 한양내 뚝섬 크기의 땅까지 소유할 정도의 부를 누리게 되었다.
이에 '장작왕'최순영은 커피에 대적할 것으로 '막걸리'를 대접했으나 커피에 길들여진 나무꾼들은 시큰둥했다고 한다.
부래상은 부래상시장을 열 정도의 재력을 쌓았으나 1920년대이후 서서히 그 재력이 줄었고, 이후 성북동에 유럽식별장을 짓고 살았는데, 그 별장이 현재 '간송미술관'이다
간송미술관 : 네이버
리뷰 220 · 매일 휴무, (임시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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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 파파고 일꾼.